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인덱스 Photo - index 론

참고>
사진.미학.1.인덱스 Photo - index 론과 비평 2005.02.28
http://monorism.com

 

일반적으로 영상 imago, image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의 시각적인 재현을 말하는 복사적 이미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물질로부터 정신적인 것을 상징하는 상징적 이미지image-symbole, 꿈이나 환상과 같은 비 현실적 생산물을 뜻하는 환상적 이미지image-fantasme, 그리고 예술적 영역에서 표현적 가치를 주는 시각적, 청각적, 음악적 또는 시적 생산물을 말하는 미적인 이미지image-esthétiqueRkwleh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적 사실주의 1)는 현실의 충실한 재현(바르트의 용어로 analogon)이라는 사실에서 또한 현실밖의 상상적 재현이 아닌 '자료적 증거'의 특징을 갖는 이유에서, 사진영상의 이해는 엄밀히 말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적 사실 다시 말해 절대적 신빙성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진은 미술이나 뎃생과 같은 다른 전통적 사실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절대적 믿음은 즉각적으로 또 다른 상황적이고 원인적 믿음의 확장을 가져오게 한다. 사진은 그때 특징적으로 단지 논리적 기억연상의 출발점으로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론적 상황에 물리적으로 관계하는 어떤 징후적 자국(인덱스)으로 출현한다.

 

사진 인덱스에 대한 이론적인 형성은 실질적으로 80년대를 돌아서면서부터이다. 더 정확히 말해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1980)에서 출발하여 필립뒤바Philippe Dubois의 『사진적 해위』(1983)과 로잘린클라우스Rosalind Klauss의 『사진적인 것』(1990)으로 이어지는 사진의 사변적 고찰 속에서 사진인덱스는 합법적으로 이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두 책은 사진계에 대단한 방향을 가져오게 했는데 우선 사진을 보는 관점의 변화와 후기 구조주의적 비평 모델로서의 사진 메디움에 적절한 이론적 양식을 가져다준 중요한 사진이론서로서 평가되고 있다. 그후 사진인덱스는 사진 비평 영역에서 토론과 논쟁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고 또한 많은 비평가들의 연구를 가져오게 하였다.

 

--MORE--

 

영상 이미지 읽기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간주되는 사진인덱스론은 사실상 급진적 성향을 띤 갑작스런 이론이 아니다. 단지 오랫동안 기호 구조주의sémio-stucturalisme적 비평의 그늘아래 잠복되었던 사진의 비논리적이고 신비적인 아우라aura에 대한 이론적 추적과 80년대 후기 구조주의 기호학자들이 재발견한 퍼스C.S Peirce 기호론과의 필연적인 이론적 합치에 사진인덱스론의 기본적 논리가 성립된다.

 

사진적 사실주의에 관한 사진 인덱스의 논리는 우선 두 가지 전제조건에서 출발하는데 즉 사진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탈 코드화된 메시지(바르트의 sans code)를 우선적으로 갖는다는 사실과 빛에 의한 존재론적인 자국trace ontologique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사진사적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사진에 관한 담론은 몇몇 사진가들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전달적이고 과학적인 기능에 관계하고 있다. 단지 19세기말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회화주의 운동 Pictorialisme에 와서야 사진적 사실주의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이 언급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카메라의 눈과 인간의 눈 사이의 관계적인 비교에 의해서만 언급되어질 뿐이다(William James,1928). 보들레르 이후 사진영상에 관해 처음으로 철학적 견지를 말한 사람은 앙리 베르그송으로 그는 1896년 『물질과 기억』에서 '사진은 단순한 현실과의 비교방법으로서 대상에 대해 감각이 아닌 외관적 재현'이라고 규정한다. 즉 '사진은 자연의 단위를 파괴하고 단지 섬광과 단편으로서만 존재한다' 고 말한다 그처럼 과학과 예술의 겸허한 종으로만 지탄받은 사진은 회화주의 운동의 사진과 예술의 도전적인 접맥에도 불구하고 기계문명의 예술이라는 원죄로 당시 어떠한 철학적 담론도 이론화 되지 못했다.

 

사진을 보는 관점의 변화는 20세기에 와서야 몇몇 선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더 이상 기계적 복사로서의 사진이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의 사진 읽기를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언어로서의 사진과 사진으로서의 사진을 보는 두 가지 방법론으로 볼 수 있다. 언어로서의 사진은 사진을 이데올로기적인 전달적 언어로서 사진을 보는 견해로 몇몇 아방가르드들의 표현적 문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회와 문화의 코드로서 사진을 해석하고 분해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진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비평체계 속에서 하나의 의미적 전달체로 본 것인데 이러한 방법적 발전은 20세기 전반기 사진영역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데올로기적 보도사진의 확장과 구조주의적 기호학의 발달에 빚지고 있다. 특히 70년대 지젤 프로인트의 『사진과 사회』(1974)와 수잔 손탁의 『사진론』(1978)의 출간은 당시 빈약한 사진 이론계에 이론적 초석이 되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사진의 사회적, 문화적 혹은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전자는 사진 메디움의 힘과 기능을 사회적 합법성에 접맥시키는 반면 후자는 이데올로기적 사진에 대한 사회적 역할을 수필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 이론서는 사변적인 도구로서 사진을 읽게 하는 진정한 사진의 이론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언어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진으로 사진을 보게 하는 진정한 합법적 이론은 사진과 롤랑 바르트의 만남에서 온다. 구체적으로 말해 1980년도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사진 이론서인 '밝은 방'에서 사진비평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잡게 했다. 오늘날 사진 인덱스론의 출발점이자 사진으로서의 사진을 보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이 책은 단순한 수필집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진 메시지에 대한 바르트의 30년 동안의 끈질긴 추적의 결과로 일종의 유언적 저서이다. 바르트는 일인칭서술의 고백론 형식으로 서술된 이 책의 문맥 하나하나 속에 사진이 발하는 감정적이고 은밀한 무엇과 응시자의 주관적 관계에서 엄청난 이론적 근거를 숨겨 놓았다. 그가 이 책에서 누설하고자 근본적인 것은 사진의 필연적으로 은닉된 비논리적 감각인 풍크툼punctum이다. 그런 측면에서 '밝은 방'은 풍크툼의 끝없는 추적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의 풍크툼은 기존의 알고있는 총체적 지식체계 즉 인식적 앎을 말하는 스튜디움을 전복시키고 또 당시 영상이론에서 지배적이었던 구조주의적 야망을 박탈시키면서 '은밀하고 세련된 그리고 폭동적 현상학'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비인식적인 고찰은 역사적으로 사실상 발터 벤자민의 탁월한 사진 감각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다. 처음으로 사진의 독자적인 은밀함을 누설하는 30년대의 그의 저서<사진의 짧은 역사>와 <기술적 재생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은 그림과 같은 다른 예술에서 볼 수 없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 측면 다시 말해 현재적 사진 이미지의 출현 속에서 지나간 과거 사실의 여운 혹은 향수를 누설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반박할 수 없는 과거사실의 출현 주위를 맴도는 비이성적인 이러한 감정을 '아우라aura'이라 하는데 주관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은밀한 특성을 갖는다. 사진의 독청성은 바로 이런 아우라를 말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사진 인덱스론의 가장 시원점이 되는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념은 당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벤자민이 발견한 사진적 아우라(말하자면 인덱스적 누설)은 1년 후인 1947년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인 앙드레 바쟁André Bagin에 의해 또 다시 언급되어진다. 그의 책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서 사진을 '자동생성La genése automatique'이라고 규정하면서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창조적 중재 없이 자동적으로 생산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진은 유일하게 인간의 부재에서 출현되는 자연적 현상인 이유로 본질적으로 사진은 결과가 아닌 생성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동생성은 외부세계에 대한 재현에 있어서 사진은 단순한 존재론적 자국 즉 기호학적으로 징후라는 사실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이론은 결국 벤자민이 아우라의 발견과 바르트의 풍크툼 그리고 오늘날 인덱스 이론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인덱스론의 실질적 골격은 바르트의 참조주의(지시적 이론)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참조주의적 이론은 사실상 앞서 말한 사진의 존재론적 생성론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이론적 발전은 점진적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 정리되어 결국 그의 책 『밝은 방』에서 이론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다. 1961년 <사진적 메시지>는 그가 추적하는 사진적 실체를 밝히는 첫 단계로, 대상과 사진 사이에는 비록 비율이나 원근 그리고 색채 같은 축소적인 요소가 있더라도 최소한 거기에는 어떠한 변형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이미지에는 외시dénotation와 공시connotation가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절대적 유사성analogon 이라는 이유로 근본적으로 탈코드화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론은 당시 코드를 근거로 하는 구조주의적 기호학에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둘째 단계로 간주되는 그의 이론적 소고<사진 이미지의 웅변>(1964)에서는 앞서 본 첫째단계의 가설을 다시 설정하는데 예시적 방법으로 광고 이미지를 도입해서 그 속에 내포된 문화적 코드와 탈코드와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바르트는 또한 이러한 탈코드 이미지에서는 현재적 사실인 '거기에 존재한다1' 'étre-lá' 와 과거적 증거를 말하는 '존재했다1' 'avoir-été -lá'가 서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제 3의 의미>(1970)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그때까지 추적한 탈 코드에 대한 세 가지 구별되는 메시지를 정의 내리고 있다. 우선 사진은 정보적이고 전달적인 메시지를 갖고 그 다음으로 상징적 체제속에서 그가 '오브비obvie'라고 말하는 의미적 메시지를 갖는다. 그리고 그가 역점을 두는 마지막 제 3의 메시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이론적인 어떤 긍지를 야기시키고 과학적 영역밖에 존재하는 일종의 과잉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메시지를 그는 '옵튜스obtus'라고 명명하고 있다.

 

최후의 유언적 작품인 『밝은 방』은 앞서 말한 자신의 이론적 추적에 대한 실증적이고 확인적인 작업으로 간주된다.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사진은 과거사실의 반박할 수 없는 증거, 즉 '그것이었다 La-a-è-tè'라는 존재론적 사실에 있다. 거기서 제 3의 메시지인 '옵튜스'를 말하는 풍크툼은 어떠한 정보적 기능도 상징적 혹은 의미적 기능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학적으로 말해 지시소deicitique적 의미로 단지 어떤 무엇을 지칭하고 있다. 문화적이고 지적 개념인 스튜디움studium과는 달리 풍크툼은 이상하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이고, 갑작스런 동요, 일종의 떠도는 섬광 혹은 파괴자로 마치 '장면을 떠나 관객을 꿰뚫는 화살과 같은 지시pointe'이다. 그것은 뭘 말하는 것인가? 정상적인 논리로서 인식되지 못하는 이러한 것들은 이미 우리들의 인식계를 떠난 비 인식계의 현상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진에 존재한다. 풍크툼의 개념은 사진 인덱스론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중심 개념으로 거기에는 사진을 의미와 스타일 등으로 특징짓는 다른 장르의 이미지와는 달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쉽게 말해 풍크툼의 지시대상은 사진에 출현한 어떤 사물, 이상함, 분위기, 제스춰 등 총체적 지시소가 사진의 장면을 떠나 일인칭 주체인 관객의 주관적 상상력과 감성을 건드리면서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의미 근처에서 떠돌게 하는 과잉적인 무엇을 말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개념적 고찰을 두 가지 방법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르트르의 『상상력』에서 사진의 근본을 찾고 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사르트르가 1936년부터 그림 혹은 사진 등의 시각적 이미지는 단순히 일방적이고 피 상적인 현실의 재현으로 이해 될 수 없고 대상과의 상호 주관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상상적 의식의 행위'로부터 사진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적 계열에서 풍크툼을 파악한다면 결국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상상력의 명제를 활용한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풍크툼의 추적은 전통적 기호학적 방법에 역행하면서 존재론적 현상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상학은 사실상 어떠한 사진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르트에게 중요한 방법적 측면을 주고 있다. 『밝은 방』에서 언급되는 단순한 구두끈, 여자 목걸이, 광대뼈, 웃는 어린아이의 썩은 이 등이 교부는 형용할 수 없는 주관적 감정들은 곧바로 현상학적 방법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진 인덱스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현상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밝은 방'은 80년대 이후 사진적 행위의 이론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적인 이론은 바르트를 따르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몇몇 비평을 가지고 왔다. 우선 '밝은 방'에서 분석적 모델로서 도입된 사진은 인덱스의 재발견에 중요한 사진적 자료가 된 만 레이나 라즐로 모홀리 나기 같은 20년대 아방가르드의 포토그램과 많은 조형적 사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보도사진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의 방법은 지나치게 시종일관 참조주의에 머물고 있는데 참조주의는 사실상 사진을 현실에만 고착되도록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르트 사진이론에서는 지시와 그 지시대상 사이에서 단지 과거시간과의 관계만을 가진다는 사실인데 이는 사진의 일반적인 문제를 축소시키고 또한 사진적 메디움을 너무 빈약하게 만드는 경향을 가진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의 조형사진들의 이해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참조주의적 이론은 사진 인덱스론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그의 책 『밝은 방』은 오늘날 '사진적 행위'의 가장 폭 넓은 이해를 주는 합법적 이론서임에는 틀림없다.

 

사진 인덱스론을 이루는 또 하나의 큰 축은 사진을 지시적 혹은 징후적 낙인photo-index으로 이해하는 측면에 있다. 이러한 견해는 80년대 이후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19세기말 미국의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인 퍼스C. S Peirce의 기호학적 유형론에서 재발견한 존재론적 지시론에 관계하고 있다. 퍼스는 그의 이론적 설명의 모델로서 사진을 언급했는데 중요한 것은 비록 비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사진을 아이콘과 상징에 대립하는 징후적 자국index으로 간주하여 대체로 존재론적 개념 주위에서 자신의 신호체계의 유형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퍼스는 사진은 아이콘도 상징도 아닌 지시(인덱스)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퍼스의<신호체계의 서술>에서 아이콘icon은 단지 그 아이콘이 외시하는 대상에 보내는 신호이며 상징symbol.은 상징이 외시하는 대상에 참조나 연상에 의한 상징적 번역 즉 코드를 근거로 하여 보내는 신호를 말하고 있다. 징후index 2)는 발자국, 연기, 먼지와 같은 그 지시대상과 '실질적 연결 la connexion ré elle' , 혹은 '물리적 연상1' association physique'의 관계를 가진다는 이유로 아이콘과 상징으로부터 구별된다. 결국 여기서는 지시와 그 지시대상 사이는 어떤 원인관계에 의해 성립하게 되는데 그런 원인성은 분명한 논리적 관계보다는 불확실하고 불특정한 그렇지만 존재적인 개념에 관계한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발견한 인덱스의 중요성은 퍼스가 정의해 놓은 단순한 진술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상황적 원인성'에 있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의 존재론적 증거로서 징후가 출현하는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과의 절대적 닮음analogon이라는 이유로 단순히 외형적 유사성을 갖는 아이콘도 아니며 또한 의미적 번역을 갖는 상징도 아닌 어떤 물리적 접촉에 의한 원인, 즉 징후성을 갖는 하나의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진이 외시하는 대상은 산너머 올라가는 연기에 비유할 때 우리는 그 원인성으로 산불, 전쟁, 통신 등의 다수의 불특정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시대상은 확실한 물리적 접촉에 의한 어떤 존재론적 상황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진은 우선 인덱스다'라고 합법적으로 정의된다. 이는 곧 사진은 찍히는 순간의 물리적 상황 속에서 출현한 절대적 혹은 시원적 자국이라는 뜻으로 앙드레 바쟁이 이미 그러한 사진의 특수성을 예견한 자동생성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인덱스의 재발견은 사진을 단순한 재현의 결과물이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도록 한다. 그 관점은 결국 바르트의 참조주의적 이론과 대체로 일치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사진을 더 이상 대상에 대한 정확한 닮음icon과 그 상징적 의미symbol의 결과물(일반적으로 널리 '사진photography'이라는 용어를 쓴다)이 아닌 어떤 상황의 원인적 생성물 혹은 흔적(이런 경우 '사진적인 것photographic'이라는 용어를 쓰며, 또 그런 행위를 '사진적 행위'라고 한다)으로 고찰하는 방법이다. 즉 '사진적인 것'이라는 것은 곧 시각적 닮음 이전에 또 그 의미 이전에 지시하는 대상과 물리적 유사성에 의한 빛의 낙인 혹은 빛의 효과로 나타난 '징후'로서의 사진을 말한다. 그러나 사진의 지시대상은 퍼스의 인덱스가 지시하는 단순한 물질적인 형태(철학용어로 forme), 예컨대 연기의 경우 산불이나 전쟁이 아닌 비물질적 형상(철학용어로 figure)을 지칭하는 존재론적 지시대상이다. 이러한 징후적 사진은 그 지시대상으로 거대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두려움, 죽음, 애석, 애착, 갈망, 사랑, 허무 등)를 끌고 있는데 마치 바다에 침수된 빙하의 하단 부분과 같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인식하는 빙하의 상단부분은 하단부분의 증거로서 사진에 낙인된 흔적 (바르트의 풍크툼적 개념)과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 사진 인덱스론에서 징후적 흔적이 비록 대상과 절대적 유사성에서 출현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지시대상은 언제나 비인식적이고 비논리적 세계를 지칭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사진이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독자적 특성을 갖는 이유가 있다.

 

사진 인덱스론에 관계하는 '사진적인 것' 혹은 '행위적 이미지' 등의 몇몇 신조어들은 공통적으로 지시적 출현의 지시대상이 탈 의미화된 영역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사진은 더 이상 의미적 체제인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탈 의미적 영역에서 그 대상을 찾는다는 것은 비인식적 무엇, 말하자면 설명되거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감각적 추적을 말하는데 사진에는 그것이 감각의 징후index로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진 인덱스의 지시대상은 근본적으로 '무의미' 적이고 거기에 명칭을 부여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무엇을 지칭하고 있다.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위해 언어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명명한 '시니피앵스signifiance' 개념과 유사하다. 원래 이 말은 사진 인덱스 용어가 아닌 오랫동안 우리의 논리적인 질서를 지배한 구조주의적 기호학의 의미소signipié에 반하는 용어이다. 그것은 또한 문화, 지식, 앎의 총체적 스튜디움적 영역에서 소외된 무엇인데 그 특징은 지칭, 감성, 리듬, 주관성, 뉘앙스 등의 대체로 비 인식적이다. 스튜디움의 대상은 일반적인 관심, 객관적인 타당성, 앎과 문화의 코드로 언제나 정보적이고 거기엔 반드시 명칭을 갖는다. 스튜디움은 그때 '난 좋아한다(I like)'라고하지. '난 사랑한다(I love)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전자는 언어학적으로 대상과 그 지시대상과의 일대일 대응을 갖는 반면 후자의 '사랑한다' 라는 것은 일대 다수의 대응으로 실질적으로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지시 대상을 갖는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사진적 인덱스의 지시대상은 단지 유일한 하나의 코드적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 속에서 또한 오랫동안 우라둘의 인식밖에서 소외된 대상들을 말하고 있다. 그때 사진의 유일한 언어는 지시소déictique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존재론적(징후적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부연적인 또 다른 메시지인 코드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인식적 논리에서 사진을 미술과 같은 장르의 사실주의와 동일시 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에 있어서 유일한 언어는 대상에 함축된 상징이나 의미가 아닌 절대적 외시 그자체인 '존재했던 것'이고 그 지시 대상은 징후적이고 지시적이다.

 

표 1

의미 siginifi 영역             |                   탈의미 signifiance 영역
------------------------|----------------------------------------
논리적, 상징적, 의도적     |                      비 논리적, 지시적, 비의도적
명칭부여                        |                                                명칭불가
인식적 포착                    |                                            감각적 포착
이성과 지식체제              |  이성과 지식이 도달치 못하는 '보충적인 것'
객관적, 정신적                |                             주과적, 물리적, 신체적
오브비, 스튜디움             |                                        옵튜스, 풍크툼
진리, 확실, 분명              |                                의문, 불확실, 뉘앙스
과학적, 실증적                |                                    비 과학적, 추리적
진술, 메세지                   |                                           감정, 멜로디


사진의 지시론적 이론은 바르트의 '밝은 방'이후 보다 구체적이고 폭 넓은 이론적 성장을 한다. 사진의 고유영역 뿐만 아니라 미술과 영화 장르에 이르는 거의 모든 영상 이론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경향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 속에서 이해하기도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해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존재론적 추적에 관계하고 있다. 바르트 이후 사진 인덱스론의 발전에 공헌한 많은 비평가들 중 미국의 여류비평가 롤잘린 클라우스Rosalind Krauss와 벨기에인 필립 뒤봐Pilippe Dubois는 탁월한 그 이론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의 공통된 전개장식은 바르트의 지시론적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각각 미술과 사진의서로 다른 장르에서 인덱스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현대미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로서의 클라우스는 그의 책 『사진적인 것』(1990)에서 사진 발명 이후 미술과 사진의 새로운 상호 관계적 분석을 시도했다. 클라우스는 사진계열의 그림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분류학적이고 연대적 기술방식이나 기준에 의해 사진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진을 미술사에 통합하고 그림 자체의 내부적 전개의 연장선상적 논리로서 사진을 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결국 뒤샹에 의해 작품에 결정된 아이콘 규칙에 사진의 인덱스 규칙을 대치시키고 있다. 미술에 응용된 사진은 단순한 아이콘이나 상징을 근거로해서 차용된 것이 아니라 사진의 인덱스에 의해 감지되는 징후의 실체, 즉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비 이성적인 것을 근거로 도용되었다는 것이다. 클라우스는 벤야민이 앗제의 정물 같은 음울한 사진에서 발견한 '인덱스의 누설'을 설명하면서 그때까지 주류를 이룬 서술적 역사적 특징을 갖는 회화적 비평을 탈피해 새로운 인덱스적 이론을 적용하고 있다. 이는 곧 사진적 계열의 미술은 사진의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비 인식적 은밀함을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응용된 것을 말하는데 특히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사진적 생산물은 사진에서 방출되는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미완성적인 그리고 총체적으로 규칙에 어긋난 '비정형적 개념'을 응용한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인덱스적 논리는 바르트가 말하는 '유일한 존재의 불가능한 과학'이라고 사진에 대해 규정한 개념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클라우스가 인덱스 이론을 미술의 영역에 접목시킨 응용적 작업과는 달리 뒤봐는 사진적 사실주의에 대한 인덱스 이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진 인덱스론의 필독서로 간주되는 그의 책 『사진적인 행위』(1983년 초판, 1990년 증보판)는 사진을 보는 관점 대한 새론운 변화를 가져오게 한 중요한 이론을 담고 있다. 그는 거기서 방법론적으로 사진을 80년도 이후 재발견된 퍼스의 유형학 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조망했고, 바르트의 참조주의를 실질적인 사진과의 관계로 재구성하여 90년대 사진 인덱스론의 기본 초석을 세웠다. 뒤바는 퍼스의 기호론에 입각하여 사진적 사실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첫 유형으로 사진을 현실의 거울le disconrs de la mimésis로 보는 관점인데 이는 대부분의 19세기 사진들이 현실의 모방에 관계하는 것처럼 사진 이미지에 투영된 현실의 효과는 우선 사진과 그 지시대상 사이에서 있는 '닮음'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첫째 유형의 닮음이 퍼스 기호론에서 아이콘을 말할 때 둘째 유형은 상징에 관계하는 사진적 사실주의를 말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현실의 모방이 아닌 현실의 변형 혹은 코드le discours du code로 사진을 본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20세기의 대부분 사진들은 현실의 변형으로 관찰된 결과물적 사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진영상은 현실의 변형적 번역'으로 코드화 된 임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형태로 분석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분류의 사진들은 현실에 내재된 내면세계를 폭로하기 위해 초월적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코드화 된 것이다. 사진을 현실의 변형으로 보는 관점은 20세기 초반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체계화되는데 특히 기호구조주의자들sé mio-structualisme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론화된다. 그때 사진의 관점은 일종의 암호해독과 유사한 의미적 분해 작업(구조주의적 비평)에 근거를 두는데 크게 두 가지 분석형태 즉 외적인 코드화와 내적인 코드화로 볼 수 있다. 전자는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외적으로 코드화 된 사진인데 사진을 사회적, 문화적, 인류학적, 과학적 참조에 의해 코드화 된 장치로 보는 견해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특히 예술적 영역에서 외적현실의 진실이 사진의 함축적 메시지에 의해 내부적으로 이동되어 내적으로 코드화 된 사진을 말한다. 그때 사진은 현실의 경험적 사실이 아닌 내적인 진실의 폭로자로 나타난다.

 

세 번째 유형은 사진을 현실의 자국le disconrs de la trace d'un ré el로 보는 관점이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은 현실의 닮음과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의미적 가치를 가지는 반면, 현실의 자국으로서 사진은 다지 대상의 물리적 접촉에 의해서만 재현되는 사진으로 개념적으로 20년대의 포토그램 계열의 사진과 유사한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찍혀진 자국 외에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상징적 함축성도 갖지 않는 절대적 지시만이 출현하기 때문에 지시론적 사진 혹은 흔히 인덱스 사진이라 한다. 앞서 미리 언급한 사진에 대한 인덱스적 관점은 최근 ꅼ 십년 동안의 유럽과 미국에서 퍼스의 유형학과 바르트 참조적 이론을 토대로 한 이론적 형성의 결과로 대체로 70년대 말 구조주의를 구성한 두 분류 죽 기호학적 코드에 근거를 두는 기호학적 구조주의자들(메츠, 에코, 바르트 등)의 사진에 관한 인식적이고 의미론적 추적에서 비 인식적이고 존재론적인 경향 결과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의미의 파괴와 하이덱그가 말하는 '망각된 존재의 추적'으로 볼 수 있다.

 

뒤바는 사진 인덱스론의 특징으로 '실용적 차원la dimension pragmatique'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런 차원은 유일하게 사진만이 가지는 '증거', '확인', 그리고 '지칭'의 사진적 특성에서 출발한다. 근본적으로 실용적 차원은 이러한 특성들이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절대적 신빙성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선 사진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과거이다. 뒤봐는 자신의 이론을 바르트가 '존재했던 것'이라고 사진의 시간성울 말하기 이전 이미 그것을 암시한 바쟁의 존재론적 '자동 생성'에 접목시키고 있는데 찍히는 손간 이전에 인간의 선택 행위가 선행한다 하더라도 또 촬영후 인간의 중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찍히는 순간에는 절대적으로 비여 있는 순간 즉 무의미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달리 찍혀진 자국의 그 자체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순간을 뒤봐는 '자국을 위한 순수행위' 혹은 '순수 지시'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절대적 '신빙성'이 생성되는데 그 생성은 단지 텅빈 상태로만 있다는 것이다. 인덱스의 실용적 차원은 이러한 확인적 생성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과거사실의 자국 혹은 어떤 현상의 징후는 관객의 사고에 의해 존재론적 그 상황이나 원인으로 환원 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예컨대 발자국, 연기, 그림자 등의 출현적 자국 등은 적어도 그 자국의 원인성으로 어떤 비 시각적이고 비 인식적인 물리적 상황을 관객의 상상이나 연상에 의해 감지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인데 환원적 인덱스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진은 단순한 모래 발자국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진은 그 자국으로부터 어떤 전염적인 힘을 뜻하는 확장적 잠재성을 갖는다. 이러한 차원 즉 실용적 차원은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환유적 확장1' expansion métonymique'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언급되어진 사실인데 뒤봐는 이런 이론적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환유성은 주제(인덱스)와 관객의 관계에서 주제로부터 관객으로의 일방적인 통로를 뜻한다. 다른 재현 방식의 영상은 관객의 능동적인 의미적 분석 혹은 객관적 코드 읽기를 통해 주제에 접근(일반적인 비평의 역할)하는 방식을 갖는 반면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반대로 주제로부터 출발된 절대적 생성(신빙성)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수동적이고 즉각적인 환원행위를 야기 시킨다는 것이다. 이때 환원행위는 관객의 주관적 상상, 판단, 기억연상 혹은 내부적으로 잠재된 무의식적 환기 등의 확장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사진의 인덱스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 순수외시 속에서 관객의 적대적 신빙성을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실과 아무리 닮은 재현이라 할 지라도 그림은 사진과 같은 그러한 절대적 신빙성을 관객에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적어도 '무엇을 의도했다' 라는 번역적 사실을 관객에게 강요한다. 그래서 사진적 사실주의에서의 주제는 '무엇을 뜻한다Cela vent dire'가 아니라 '단지 존재했다ca-a- été' 라는 단순한 사실이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 무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이 진술하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혹은 일부를 알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사진 인덱스(특히 바르트의 풍크툼)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고 그 텅 빈 의미는 관객의 활용적 차원, 다시 말해 주관적 사고의 점진적이고 폭발적인 확장에 의해 주제의 지시대상(시니피앵스)이 전이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사진의 내용적 전달은 흔히 미술비평에서 행하는 창작자와 작품과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의미적 추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와 관객사이에서 주관적이고 비논리적 상황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사진을 보는 관점은 주제와 관객subject-spectator 사이에 있는 셈이다.(바르트의 참조주의 경우) 3)

 

결국 사진 인덱스론에서 비록 전혀 예술적 의도가 없는 광고사진이나 잡지사진이라 할지라도 사진을 이해하는 관점은 더 이상 일방적 의미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주관적이고 즉각적인 사고 작용에 의한 확장에 있다. 사진 실행자의 창작적 의도나 감각의 동기(창작 생성)는 대체로 사진에 찍혀지는 징후(인덱스)의 본원적 상황에 있고 또한 그런 '사진적인 행위'의 생성물로서 인덱스는 관객에게 역으로 최초의 감각적 상황을 환원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언제나 인식적 영역 밖에서 존재한다.l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진은 의미적 체제를 가지기 이전 우선 인덱스다. 언제나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이러한 서로 다른 두 체제 (의미와 인덱스)가 마치 동전의 앞면과 이면처럼 양면적 차원 혹은 중복차원으로 출현한다. 획일적이고 과도한 인식적 논리에서 벗어난 또 다른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감각과 감성의 사진, 그것은 진정한 사진의 이해이며 동시에 사진이 더 이상 다른 예술 장르와 동일한 형태로 간주되지 않는 사진으로서의 사진일 것이다. 사진이 작가가 번역하는 현실의 단순한 의미적 재현이 아닌 존재론적 징후로서의 사진이 될 때 사진은 응시자의 주관적 감성에 의해 그 진정한 사진적 가치를 가진다. 다시 한번 상기 하지만, '사진은 의미 이전에 인덱스다'.

 

참고 문헌

1.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d. Cahiers du Cinéma, Seruil, Paris, 1980

2. Roland Barthes, L'obvie et l'obtus, ditions du Seuil, Paris, 1982

3. André Bag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1945), in Qu st cequeé le cinéma : Tome l, Édition Cert, Prks, 1975

4. Walter Benjamin, Petite histoine de la photographique, Deno ë l/Gomthier, Paris, 1971

5. P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than, Paris, 1990

6. Rosalind Klauss, Le photographique, Macula, Paris, 1990

7. La recherche photographique, Maison Europé enne de la photographie, N°12 Juin, Paris, 1992


  
 
[주석]
1)사진적 인상을 주는 총체적 사실주의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카메라에 의 해 생산된 영상을 지칭한다.
2)일반적으로 ´지시´라고도 하지만 어떤 사실의 부분 혹은 흔적과 같은 의미적 측면에서 ´징후´로도 표기한다.
3)사진 인덱스 개념에서 또한 주제와 실행자(Denis Roche)혹은 주제와 장면 사이에서 사진의 관점을 찾기도 한다.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message).” - Marshall McLuhan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message).” - Marshall McLuhan

 

참고1> 미디어와 인간의 확장 - 이남표 (2002) 

 

이니스(Harold Innis)의 기술결정론

  1. 기술의 혁신이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원동력이다.
  2. 여러 기술 중에서 특히 커뮤니케이션 관련 기술이 중요한데, 이는 인류의 기본적인 인식 능력의 확장 및 연장이다.
  3.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발전은 커뮤니케이션 관련 영역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니스의 미디어 결정론에서 핵심 개념은 미디어의 ‘편향성(bias)’이다.

시간 편향적 미디어(time-biased media) - 운반이나 수송이 어렵고 내구성이 강한 미디어로 기록과 보존의 특성이 있다.

공간 편향적 미디어(space-biased media) - 내구성이나 지속성이 약하지만 이동이 편리한 미디어로 정보 교환과 대중매체의 효과적인 활용이 특징이다.

 

이니스의 핵심 가정은 “진정한 권력이란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는 능력”에 달려 있으며, 이는 오로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통제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김정탁, 1998: 157-158)

 

미디어는 메시지다.

전통적인 시각은 미디어를 어떤 커뮤니케이션 내용의 통로나 용기로 보며, 따라서 용기보다는 내용을 우위에 둔다. 그러나 McLuhan은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과는 별도로 미디어 자체가 지닌 내용을 강조한다.

 

전깃불(eletric lighting)은 순수한 정보(pure information)다. 그것은 메시지 없는 미디어다.(M,McLuhan, 1964: 8)

만약 사람들이 바퀴나 인쇄술이나 비행기가 우리의 감각인지 습관(habits of sense perception)을 진짜로 바꾸었는지를 의심한다면, 그러한 의문은 전깃불과 함께 끝난다. 이러한 영역에서, 미디어는 메시지이며, 전깃불이 들어오면 감각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 불빛이 꺼지면 세계는 사라진다.(M,McLuhan, 1964: 128-129)

 

McLuhan의 저서 「Understanding Media」의 부재는 “The Extensions of Man”

옷은 인간 피부의 확장이며 바퀴는 인간 다리의 확장이라고 그는 파악한다. “미디어는 인간의 신체와 감각들의 연장을 창발시키는 모든 테크놀로지를 망라”하기 때문이다.

 

핫 미디어(hot mediaum)/쿨 미디어(cool medium)

핫 미디어는 우리의 단일 감각을 높은 정세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 (...) 사진은 시각적으로 “높은 정세도”를 가진다. 만화는 “낮은 정세도”를 가지는데, 매우 적은 시각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화는 쿨 미디어, 또는 낮은 정세도를 가지는데, 귀가 빈약한 양의 정보를 받기 때문이다. (...) 따라서 핫 미디어는 참여도가 낮고 쿨 미디어는 참여도가 높거나 수용자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라디오와 같은 핫 미디어는 텔레비전과 같은 쿨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효과를 이용자에게 미친다.(M,McLuhan, 1964: 22-23)

 

*정세도: 메시지에 대해서 인간의 단일 감각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밀도로 데이터의 충실한 정도

*참여도: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메시지의 뜻을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상상력 투입량의 수준

 

McLuhan의 인류 역사에 대한 관점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구어 형식에서, 인쇄 형식을 거쳐, 전자 형식으로 변천함에 따라 각각 인간 집단을 부족화(tribalization)에서, 탈부족화(detribalization)를 거쳐 재부족화(retribalizatiob)시켜 나간다"는 관점에서 파악한다.(김경용, 1997: 75)

 

McLuhan의 인류역사 구분 정리(김균, 1997: 110-111)

  1. 구어시대: 인간이 동시성과 순환성이 중시되는 귀의 문화(ear culture) 속에서 살며, 모든 감각의 사용을 통한 심층적인 경험을 한다. 여기에서는 과거 부족사회에서와 같은 상호 의식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2. 문자/인쇄시대: 문자, 특히 인쇄술의 등장으로 나타난 시각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을 소리, 신체적 접촉, 즉각적 반응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인간으로 변화시켰다. 결국, 인간의 삶은 인쇄된 문자의 모습을 닮은 선형적이고 인과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 전자시대: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전자시대의 인간은 최대한의 감각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전자 미디어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인, 파편적이기보다는 통합적인 성격을 가진 문자 이전의 인간형을 부활시킨다. 따라서 세계는 다시 부족의 시대, 이른바 ‘지구촌(global village)’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미디어는 마사지이다(The medium is the massage).

오늘날 미디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를 “주무르고”있는가를 말하는 경구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그 의미

테크놀로지의 효과는 의견이나 개념의 수준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꾸준히 그리고 어떠한 저항도 없이 감각비율(sense rations)이나 지각유형(patterns of perception)을 바꾸어 놓는다. 아무 탈 없이 테크놀로지와 마주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술가인데, 이는 그가 감각 인식의 변화를 깨닫고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M,McLuhan, 1964: 18)

 

 

참고2>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론: 이론과 사상 - 임상원, 이윤진(한국언론학회, 2002)

 

McLuhan은 기술결정론자는 아니다.

McLuhan이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기술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 미디어의 기술을 통해 인간, 커뮤니케이션, 문화, 문명에 대해 말한다.

 

McLuhan은 모더니티를 비판한다. 그 비판의 핵심은 활자화된 문자 즉 인쇄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의 생명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외된 근대인과 획일화된 근대문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상실된 커뮤니케이션의 생명력을 전자미디어가 복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전자미디어에 대한 기대의 근거이다. 

 

언어(language)와 말(speech)은 감각의 외화(外化)로 이는 “인간이 경험과 지식을 용이하게 운반하고 우리가 최대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축적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도구이다.” 언어는 그것이 경험을 저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형을 한다는 의미에서 메타포이다. 번역을 하는 특별한 기술적 도구에 대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는 감각의 거대한 확장이 ‘폐쇄적 체계’를 만든다는 점이다. 자연 상태로서의 우리의 감각들은 폐쇄적이지 않으며 그들은 우리가 공유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경험 속에서 이 감각내용을 저 감각내용으로 끝없이 서로 번역한다. 그런데 우리의 확장된 감각들, 도구들, 기술들은 우리들의 5개 감각들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이들 감각들이 집합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하였다. 즉 감각들 간의 소외현상이 생겼다. 시각과 촉각 간에 시각과 음성 간에 갈등을 낳고 시각이 다른 감각들을 소외시켰다. 이것이 현대 문명이다.

 

구술문화적 접근방식(어셔 Abbot Payson Usher, 토크빌 Alex de Tocueville)

사건을 시각적으로 조망할 때는 어떤 하나의 고정된 관점을 지니게 된다. 구술문화적 방식은 눈이 아니라 귀를 통해 인지할 때와 같이 ‘줄을 세우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동시에 수용’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Tocueville -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해 훨씬 더 잘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상호작용의 장’ 혹은 ‘혼합의 장’을 갖고 있다는 조건 때문이다.

McLuhan - '상호의존성'이라는 유기적 기능은 알파벳, 활자 문화에는 결핍되어 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McLuhan은 인쇄와 근대를 연결시켜 비판한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변화, 특히 인쇄로 인해 강화된 문자문화인 근대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인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의 영향은 효과이론에서처럼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축적적인 것이다. McLuhan은 이를 “미디어가 지닌 구조화하는 힘”, 즉 잠재적아고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미디어의 힘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그간 모더니티 혹은 근대의 과정에 대한 많은 설명에서 미디어라는 차원이 배제되었음을 지적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변동에 있어서의 마디어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로 놓는 것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인간과 인간간의 소통의 양식인 동시에 인간의 세상에 대한 지각의 양식이자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조직하는 양식이다. 이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한 사회 혹은 한 시대의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줄기라는 말이다.

 

커뮤니케이션 양식과 문화와의 관계는 그의 감각이론에 근거한다. 그의 감각이론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감각이 조화롭게 활용되는 감각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은 알파벳과 인쇄로부터 비롯된 근대의 시각적 서구문명이 갖는 정신적 편향과 그로 인한 폐해를 비판하는 토대가 된다. McLuhan의 감각적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두 가지 지적 전통의 결합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철학 특히 그의 지각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게스탈트 심리학 및 이로부터 영향 받은 언어이론이다. 맥루한의 정적이고 공시적인 특징이 토마스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역사적이고 통시적인 측면은 게스탈트 이론에 연원을 둔다.(J.Stemps, 1995, 97)

 

아퀴나스는 지각이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론형식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세계에 정확히 부합하는 개념을 형성해야 하고 감각대상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지각을 활용해야 한다. 감각 가능한 세계 즉 ‘sensible world’는 일련의 복잡한 비율/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크기, 색깔, 재질과 같은 특질들의 배열(configuration)이다. 개념을 형성하기위해 감각들은 이러한 배열을 인식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감각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감각들을 통해 형성하는 개념을 기본 지식으로 생각한 것은 이성을 통해서만 신의 질서 즉 로고스를 인식할 수 있다는 플라톤적인 생각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그의 예술관에서도 나타나는데, 아퀴나스는 미를 인지적 능력과 연관시킨다. 아름다운 것들은 “볼 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미는 적절한 비례에 있다. 감각들은 자신의 고유한 종류에 부합하도록 적절한 비례를 가진 사물에게서 즐거움을 얻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지적 능력들이 그러하듯이, 감각도 일종의 이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김혜숙/김혜련, 1995, 149-153)

 

오감을 통한 감각자극들은 분산된 데이터 단위들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혹은 지각적 게스탈트로서 지각된다. 많은 감각자극들로부터 통일된 하나의 지각을 끌어내는 것은(many-to-one translation) 아퀴나스가 통감각(common sense, sensus communis)이라 부른 기관으로 이는 감각간의 통역을 행하는 통일된 지각의 장소로 보편적 감각인 촉각을 통해 만들어진다.(J.Stamps, 1995, 102)

 

합리성을 촉각적으로 재규정함으로써 McLuhan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 즉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논증이라는 합리성은 진정으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것이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 촉각이론은 McLuhan의 새롭고 유연한 지식이론의 핵심으로 그의 청각에 기초한 패러다임의 토대를 이룬다. McLuhan은 육체와 정신, 감각과 이성간의 오랜 분리와 후자에 의한 전자의 지배를 “시각화”의 결과로 보고 이들을 재해석하면서 “촉각성”의 복원을 통한 이들의 유기적 통합을 기대했다.

 

McLuhan에게 영향을 준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은 게스탈트 이론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론이다. 그의 의문은 “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들에 의해서 그처럼 서로 다른방식으로 표현되어 왔을까?”였다(E.H.Gombrich, 1972/1981, 21-49). 그에 의하면 지각은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복잡한 감각적 선택들을 통해 잠재의식 차원에서 작용하는 가설형성 과정이다. 저기 있는 것을 그냥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특정한 감각자료에 초점을 맞춘다. 러스킨이 말한 것 같은 ‘순진한 눈(innocent eye)’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이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이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이 문화적으로 조건 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지각은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건은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가? 곰브리치에 의하면 그것은 문화의 표현 매체에서의 기술적 변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근대의 과학적 재현으로의 예술적 재현의 변화를 도식적인 것(schematic)으로부터 재현적인 것(representational)의로의 변화, 즉 ‘창출’(making)에서 ‘상응’(matching)으로의 변화로 보면서, 이러한 변화에 따라 사물에 대한 예술의 (혹은 인간의) 모사적 관계(mimetic relation)가 파괴되고 관계들의 질적인 차원이 배제되었음을 비판한다. 이는 구술사회에서 문자사회로 변화라는 McLuhan의 연구와 유사한 것이었다.

 

인간은 감각자료들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모든 종류의 미디어는 인감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감각의 확장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특정한 사회의 지배적인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균형에 영향을 주는 조건이 된다. McLuhan의 미디어는 특정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화폐, 교통수단 등을 망라한 거의 문화에까지 확장되는 폭넓은 개념이다. 이러한 미디어들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둘러싸고 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 기반, 환경을 이루며 인간의 감각과 상호작용한다. McLuhan의 감각적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이전까지 미디어에 대한 접근방식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즉 미디어의 종류에 관계없이 그 내용(메시지)에 대한 시비나 그 효과에 대한 평가등이 주를 이루었던 커뮤니케이션 이론들을 비판하고 미디어 자체가 인간과 사회,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돌리도록 한 것이다.

McLuhan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을 외화한 모든 것이 미디어이다. 따라서 언어와 말 또한 “감각의 외화이거나 음성화로 이는 인간이 경험과 지식을 용이하게 운반하고 우리가 최대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축적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도구”(McLuhan, 1962/2001, 20), 즉 미디어이다.

 

 

 

* 이 정리는 참고 논문(서적)을 것으로 정리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반드시 본 읽고 연구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길 바란다.

 

comment>

위의 참고2>의 내용은 McLuhan의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위한 정리이다. 이 외에 언어의 ‘선형적 시각화’에서 공감각적인 ‘촉각’으로의 회귀에 대한 이야기와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 논문을 확인해야 한다.

물신적 부인

 

“나는 .....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믿는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물신적 부인은 도착증의 정신 병리적 구조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나 여자아이를 통해 페니스 부재를 최초로 목격했을 때 그는 눈으로 관찰한 사실을 부인한다. 그 같은 부재(결여)는 어머니를 완전하고 전능한 존재로 여기는 아이의 믿음과 모순되며 아이에게 거세의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점차적으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만, 특별히 어머니의 거세 현실에 집요한 태도를 보이는 도착증자는 눈으로 관찰한 현실을 ‘부인’하고 여자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고집한다. 이때 아이는 전능한 어머니의 표상과 인정라고 샆자 않은 거세된 어머니의 표상이 불러일으키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창조하는데, 이 타협형성물이 바로 물신이다. 이제 이 물신적 대상이 주체가 그의 믿음과 관련해 가지고 있었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심리적 역동이 ‘나는 (어머니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라는 물신적 부인이다.

   부인의 기제는 신경증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신경증자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능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얻을 것이라 기대되는 완전한 만족(향유)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전능한 어머니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기보다 ‘억압’되며 향후 주체의 심적 역동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프로이트가 “신경증은 도착증의 음화다”라는 명제를 통해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옥타브 마노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떻게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신경증적 주체에게 물신적 부인의 구조가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물신주의자(절편음란증 환자)는 자신의 도착증과 관련해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이라는 정식을 물론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여자들이 팔루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첨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물신(절편)이기 때문이다. 신경증 환자는 그것을 말하느라고 온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팔루스의 존재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신경증 환자는 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는 일종의 전치를 통해, 다른 믿음들과 관련해 부인 Verleugnung의 메커니즘을 이용한다. 마치 어머니의 팔루스와 관련된 부인이 현실 거부의 최초 모델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어머니의 팔루스의 부인이] 경험을 부인하면서까지 살아남는 믿음의 기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인(신경증자인) 주체는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그렇지 않은 믿음에 우선순위를 두는 심적 기제(물신적 부인)를 가지고 있다. 이 심적 기재의 이해는 주체와 법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친숙한 역설을 해명하는데 하나의 길을 열어준다. 법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바를 성공적으로 이행하고 있을 때, 법에 대한 주체의 태도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모든 일이 순리에 맞게 진행되고, 주체는 법을 수긍하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법이 실패하는 사례와 마주하게 되면 주체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이런 순간 종종 등장하는 문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법이 때때로 그 취지에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이 정의실현과 행복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진술은 법을 존재론적으로 정립하는 궁극적 논리를 담고 있으며, 그 논리는 단순하고 명확한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그 논리가 그리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교묘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 문장 ‘나는 법이 때때로 그 취지에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가 실제적 지식(앎)에 해당한다면, 뒷문장인 ‘나는 법이 정의실현과 행복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상징적인 믿음과 관련한다. 즉 두 문장은 서로 다른 층위에 관련하여 진실이다. 문제는 이 두 분장 사이에 끼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가 그 두 층위의 간극을 교묘하게 은폐한다는 점이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의 내용이 서로 상반됨을 의미하는 이 접속사는 둘의 간극을 드러냄으로써 첫 번째 진실이 두 번째 진실을 취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공하는 듯하다. 하지만 두 진실은 같은 무게를 지닌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두 번째 진실은 첫 번째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훼손함으로써 간극이 해결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문장 사이에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긍정적으로 앞 문장을 취소하고 권위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 논리는 특별히 기만적인 허위의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누구나가 상징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방식과 관련된다. 일상에서 우리의 눈이 목도하게 되는 현실은 종종 우리가 믿고 따르며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이상과는 모순된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처리해야만 하는데, 이때 무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믿는다)’라는 물신적인 부인의 기재가 작동하는 것이다.

 

 

참고>

<해안선>, 기괴한 영웅담 혹은 자기-희생의 도착적 기만

김정선, International Journal of Žižek Studies, Vol 3, No 2 (2009)

 

* 이 정리는 참고 논문(서적)을 정리한 것으로 정리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반드시 본 논문(서적)을 읽고 연구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길 바란다.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란?

구체적으로 연구대상에 대해 얻은 자료를 계량화하는 방법으로 가공하느냐의 여부와 논문의 핵심 주장부분을 통계적 유의성 검증에 의존하느냐의 여부가 질적 연구인가 아닌가의 판단기준이 된다. 질적 연구는 무엇보다도 연구윤리의 확보가 치명적이다.

 

질적 연구의 중대한 특성으로 연구자와 사물 간에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토대로 연구자 저마다의 사회적 현실(multiple realities)의 형성(구성)이 가능하다. 그 과정은 연구자가 사물을 이해해가는 의미해석(sensemaking)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가치개입적일 수 있으며, 결국은 “실증적(positive)”이라는 용어는 ‘질적 연구다운’것과는 어느 정도는 상존하기 곤란한 것이 되기도 한다.

 

질적 연구는 비교적 덜 알려진 영역에서의 사회적 실체와 현상이 어떻게 해석, 이해되고 경험되거나 생성되는가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의 사회적 맥락에 큰 관삼을 갖는다. 설명방법에 있어서도 현상의 피상적인 유형, 추세니 상관관계의 묘사보다는 ‘본질적인’ 형태의 분석과 설명을 보다 강조한다.

 

양적 연구 - 연구대상의 분석단위를 동일하게 한 후 연구할 속성의 수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하거나 자료 분석에 통계분석기법을 사용한다.

질적 연구 - 연구대상이 특정 사회 환경에 놓여 있는 행위자에 의해 지각된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체(socially constructed reality)를 추구한다.

 

연구방법의 유형

연구방법의 유형 1: 가설 검증적 실증적 연구

자료수집: 질적 정보 > 양적 정보로 변환(주로 비율 척도)

분석단계: 통계적 유의성 분석 > 결론도출

 

연구방법의 유형 2: 전통적 질적 분석(예: 내용분석)

자료수집: 질적 정보 > 양적 정보로 변환(명목·순서 척도)

분석단계: 컴퓨터로 코딩·정리 > 해석

 

연구방법의 유형 3: 상향(근거)이론

자료수집: 질적 정보

분석단계: 가이드적 개념화 > 연구자의 해석(이론도출)

 

연구방법의 유형 4: 고도의 질적 연구

자료수집: 질적 정보

분석단계: 연구자의 주관적 해석

 

양적 연구 - 사회의 모든 현상이 인과관계라는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전재하고 이를 규명하기위해 이론(가설)검증을 한다. 방법자체가 이론부터 설명하고 들어가거나, 혹은 이론을 전재로 연구 참여자의 인터뷰 내용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질적 연구 - 사회현상의 단일성이나 인과관계를 전재하지 않고, 개별 사례(연구대상)의 독특성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둔다. 인터뷰 내용의 진실의 신빙성 여부나 인지적 편차(bias)문제를 중요 이슈로 다루기 때문에 인용문을 사실적 주장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질적인 질적 연구(유형3,4)는 연구의 출발 단계에서 전혀 이론(theory)에 근거를 두지 않고 출발한다. 그 이유(moments)는 연구 참여자(natives 즉 연구대상)의 모멘트, 연구자(researcher)의 모멘트, 독자(audience)의 모멘트 이다. 질적 연구는 세 가지 모멘트들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토대로 ‘의미’를 이끌어내는 장점이 있다. 자료로부터 명명된(label) 개념으로부터 점점 더 넓게 추상화 시켜나가는 상향식(bottom-up) 귀납연구이다.

 

질적 연구의 중점(양적 연구와 비교되는)

1. 충분한 연구기간(The machinary of time)

2. 주관성의 원칙(The machinary of subjectivity)

3. 부정합성의 원칙(The machinary of What Does Not Fit)

4. 관계성의 원칙(The machinary of Relationship)

5. 맥락의 원칙(The machinary of Context) -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

 

질적 연구의 유형별 연구전략

A. 사례연구(case studies)

경계가 뚜렷한 연구대상에 대한 관찰, 인터뷰, 자료 분석 등을 통해 어떤 현상을 기록, 보고, 진술하는 것이다.

 

B. 문화기술적 방법(ethnography, 민속학적 연구방법론)

사회집단의 총체적인 문화(), 즉 집단구성원들의 행위. 신념, 가치,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기술하여 이해한다.

 

C. 근거이론(ground theory) - 수집한 자료로부터 귀납적으로 이론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1. 관심주제 선정(미리 설정된 가설이 없이 연구 시작)

2. 연구목적을 결정(초기 증거의 정확성 평가, 경험에 기초한 일반론의 확립, 개념의 확인, 기존이론의 검증, 새로운 이론 형성)

3. 연구대상 집단을 선택

4. 연구자료 수집(자료수집, 코딩, 해석을 동시에 진행)

5. 자료의 개방된 코딩

6. 자료의 이론적 코딩

7. 새로운 이론 개발

 

D. 행위연구(action research) - 실증적이면서 객관적

조직구성원 개인의 행위를 중시하여 실제로 일어난 조직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여 조직인들의 전략과 조직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제약점을 본다. 이를 통하여 일종의 반복적인 행위전략들의 총합으로서 행위체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E. 현상학적 연구(phenomenological studies)

보다 폭넓은 접근방법들의 수용, 국지적 현상 이해,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의 방법

 

F. 해석학(hermeneutics) - 중요문헌과 서적, 서면 등으로 전달된 의미를 해석

1. 인간의 행동이나 주장이 나오게 된 역사적 조건에 관련 지식을 뜻하는 경우

2. 어떤 현상이나 텍스트(text)가 지니는 진리내용(truth contents)을 뜻하는 경우

 

좋은 질적 연구결과물의 요건

  1. 어느 것을 연구 했는가 연구대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You should find a description of the study and what is about)
  2. 정보(자료)가 수집된 맥락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You should find a description of the context in which the data were collected)
  3. 같은 맥락에서 과연 누거, 무엇을, 언제, 어떻게, 왜 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You should find an account of what was done in context)
  4. 실제 획득한 1차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You should find presentation of actual data)
  5.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을 하나 또는 복수이상의 결론을 요약해야 한다.(You should find an explicit effort to sumarize as articulate, one or several conclusion)

 

 

참고>

질적 연구 방법의 내용과 적용전략: 양적인 질적 연구와 질적인 질적 연구

임도빈,「정부학연구」제15권 제1호(2009): 155-187

 

* 이 정리는 참고 논문(서적)을 정리한 것으로 정리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반드시 본 논문(서적)을 읽고 연구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길 바란다.

 

comment>

일반적인 국내 석사학위 논문은 ‘유형 1’과 ‘유형 2’라고 한다. ‘새로운 논리, 이론’이 아닌 ‘얼마만큼 공부했는지’에 대한 증명이라고도 한다. 결국 ‘질적인 질적 논문’으로는 학위 취득이 어렵다는 이야기 이다. 이 내용으로 보아 학위 논문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여야 하는지는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2년의 대학원, 학위논문의 시작

지난 2년간 회사와 학교를 오가며 배운 것은 없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와 R.L.러츠키의「하이테크네-포스트휴먼 시대의 예술, 디자인, 테크놀로지」에서 시작한 이 2년간의 여행은 올리버 색스의 「화성에서 온 인류학자」와 로라 멀비의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마무리 되는 듯하다.
2년 동안 익숙해진 단어들은 남근, 프로이트, 기호학(기표/기의), 정신분석 등이다.
이 이야기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다.
대략 그러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뿐이다.
지난 주말 시그마그래프에서 출간한 John D. Cone 의 「학위논문 작성법 : 시작에서 끝내기까지」를 읽으며 느낀 것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08년 초 「논문작성법 : 인문,사회과학편」(논문작성법교재편찬위원회 편 | 건국대학교출판부)을 읽을때는 느끼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었다.(혹은, 내용은 있었지만 이해할 능력이 부족했을 경우도 생각해 본다.)
결국 나는 1차적으로 논리학과 통사론(구문론)을 공부해야 하고 타이핑 방식을 수정해야 하며(지금은 3손가락 독수리다.) 통계학을 공부히야하고 논문작성 규칙을 숙지해야한다. 이후 전체적인 연구 계획(개괄)을 잡기 위하여 선행연구를 모두 읽어야 하고 예상되는 가설을 새우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질적 자료들을 수집해서 양적 통계를 내야한다.
나에게는 1달에 5일 정도의 시간이 발생한다.(회사 업무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쓴다.) 논문의 마감을 내년 9월로 설정할 때 지금부터 9개월의 시간이 있는 것이고 30일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 1일 집중도를 고려한 연구 시간은 12시간 정도로 설정하면 360시간 뿐 이라는 암담한 결과가 나온다. 내가 학위논문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경험상 3~5시간 정도이고 출간된 도서의 수용 시간은 10시간 정도 소요된다. 문서의 작성 시간은 A4 한 장에 30-60분이 걸린다. 2시간에 3장을 작성한다고 생각한다. 석사학위 논문 양은 100장 정도라고 설정하면 작성에만 60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럼 수정시간 까지 고려하여 초안이 나와야 하는 시간은 100시간 전이 된다. 결국 260시간이 과정에 들어간다. 이중 120시간을 선행연구 분석에 사용한다 하여도 25개의 학위논문을 읽는 정도이고 도서로 바꾸면 12권의 수준이다.(지금 관심이 있는 분야는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한다.) 또한 연구 시작 전 선행해야하는 공부도 가벼운 분량은 아니다.
...
그런데 꼭 해보고 싶다.
학교를 다니며 가장 명확하게 배운 것은 남의 글을 통한 간접경험의 즐거움이다.
내가 무언가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간접경험을 정리할 것이고 그 과정을 정리하여 내 기억의 연장과 다른 사람의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지금의 희망(혹은,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