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물신적 부인

 

“나는 .....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믿는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물신적 부인은 도착증의 정신 병리적 구조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나 여자아이를 통해 페니스 부재를 최초로 목격했을 때 그는 눈으로 관찰한 사실을 부인한다. 그 같은 부재(결여)는 어머니를 완전하고 전능한 존재로 여기는 아이의 믿음과 모순되며 아이에게 거세의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점차적으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만, 특별히 어머니의 거세 현실에 집요한 태도를 보이는 도착증자는 눈으로 관찰한 현실을 ‘부인’하고 여자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고집한다. 이때 아이는 전능한 어머니의 표상과 인정라고 샆자 않은 거세된 어머니의 표상이 불러일으키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창조하는데, 이 타협형성물이 바로 물신이다. 이제 이 물신적 대상이 주체가 그의 믿음과 관련해 가지고 있었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심리적 역동이 ‘나는 (어머니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라는 물신적 부인이다.

   부인의 기제는 신경증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신경증자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능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얻을 것이라 기대되는 완전한 만족(향유)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전능한 어머니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기보다 ‘억압’되며 향후 주체의 심적 역동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프로이트가 “신경증은 도착증의 음화다”라는 명제를 통해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옥타브 마노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떻게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신경증적 주체에게 물신적 부인의 구조가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물신주의자(절편음란증 환자)는 자신의 도착증과 관련해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이라는 정식을 물론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여자들이 팔루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첨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물신(절편)이기 때문이다. 신경증 환자는 그것을 말하느라고 온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팔루스의 존재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신경증 환자는 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는 일종의 전치를 통해, 다른 믿음들과 관련해 부인 Verleugnung의 메커니즘을 이용한다. 마치 어머니의 팔루스와 관련된 부인이 현실 거부의 최초 모델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어머니의 팔루스의 부인이] 경험을 부인하면서까지 살아남는 믿음의 기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인(신경증자인) 주체는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그렇지 않은 믿음에 우선순위를 두는 심적 기제(물신적 부인)를 가지고 있다. 이 심적 기재의 이해는 주체와 법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친숙한 역설을 해명하는데 하나의 길을 열어준다. 법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바를 성공적으로 이행하고 있을 때, 법에 대한 주체의 태도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모든 일이 순리에 맞게 진행되고, 주체는 법을 수긍하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법이 실패하는 사례와 마주하게 되면 주체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이런 순간 종종 등장하는 문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법이 때때로 그 취지에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이 정의실현과 행복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진술은 법을 존재론적으로 정립하는 궁극적 논리를 담고 있으며, 그 논리는 단순하고 명확한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그 논리가 그리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교묘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 문장 ‘나는 법이 때때로 그 취지에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가 실제적 지식(앎)에 해당한다면, 뒷문장인 ‘나는 법이 정의실현과 행복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상징적인 믿음과 관련한다. 즉 두 문장은 서로 다른 층위에 관련하여 진실이다. 문제는 이 두 분장 사이에 끼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가 그 두 층위의 간극을 교묘하게 은폐한다는 점이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의 내용이 서로 상반됨을 의미하는 이 접속사는 둘의 간극을 드러냄으로써 첫 번째 진실이 두 번째 진실을 취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공하는 듯하다. 하지만 두 진실은 같은 무게를 지닌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두 번째 진실은 첫 번째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훼손함으로써 간극이 해결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문장 사이에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긍정적으로 앞 문장을 취소하고 권위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 논리는 특별히 기만적인 허위의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누구나가 상징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방식과 관련된다. 일상에서 우리의 눈이 목도하게 되는 현실은 종종 우리가 믿고 따르며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이상과는 모순된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처리해야만 하는데, 이때 무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믿는다)’라는 물신적인 부인의 기재가 작동하는 것이다.

 

 

참고>

<해안선>, 기괴한 영웅담 혹은 자기-희생의 도착적 기만

김정선, International Journal of Žižek Studies, Vol 3, No 2 (2009)

 

* 이 정리는 참고 논문(서적)을 정리한 것으로 정리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반드시 본 논문(서적)을 읽고 연구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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